고향/죽장

지원이와 얼음썰매 타기

반딧불이(죽장) 2009. 12. 22. 09:44

옛날 유년시설 겨울놀이라면 당연히  1순위로

얼음썰매(스켓토) 타기 이겠지요.

 

시골에서 자란 4 ~ 50대 우리님들은 

아련한  추억이고  고향의 향수 이겠지요.

  

큰아이 어렸을때 부터 겨울이면 얼음썰매 (스켓토)

타려 고향 죽장 거랑으로 다녔는데....

 

몇일 영하권 날씨에 우리 지원이도 아는지~~~

 아빠 주말에는 죽장에  얼음썰매타려 가자고 하여서

약속은 하였는데 결빙상태가 어떨지 걱정이 앞서지만

 

우리  지원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줄려고

"09년  12월 20일"  영하권 날씨에 불구하고 나서봅니다.  

 

 

▲ 죽장 들어가면서 새음지인 까지소에 들려보니

물 흐름 구간에  몇일간  영하권 날씨에도 불구하고

결빙상태가 위험한 부위가 있어서.....

까치소산장펜션 앞으로 이동하여 한켯 잡아 보았습니다.

 

얼음썰매 스켓이트 타고 연 날리기에는  별 무리가 없지만

 영하권 날씨와  찬 골바람 영향으로 아이들 감기 걸리것 같아서

임암서원 앞 솔안다리 밑으로 달려가니 꽁꽁 언

얼음이 우리들을 반겨 주네요.  

 

둘째 선민이와 지원이

 

옛날 선민이도 많이 타고 놀았지~~~

영하권 날씨에 동생 혼자서  심심할것 같아서 따라 와서

동생과 함께 놀아 준 우리 선민이 고마워!

 

 

  

 ▼ 우리 지원이랑  폼 함 잡아 보고~~~

 

 

▼ 아무도 타지 않은 얼음은  수정 같으면서~~~

피레미, 갈겨니 노는 모습이 뚜렷히 보이네요. 

 

 

▼ 두시간 정도 아이들과 놀고 있으니 매년 오는지~~~

 

젊은친구 서너가족들이 야외용 텐트를 치고

석유난료등 완전무장 하여 죽장 솔안마을에서 좋은추억을 만들고 있네요.   

 

 

▼ 집 사람과 함께 가지 못 해 ~~~

아쉬운데로 계란 삶고 아이들  컵 라면 준비 중 입니다.

 

추운날 바깥 야외에서 먹는 컵 라면 먹어보지 않으면

그 맛을 모르지요.....

 

 

 

ㅎㅎㅎ 콧물을   흘리면서  아빠 컵라면 까지  두봉을 먹고 있네요.

 

   

임암서원 주변

 

 

 

▲▼ 일제당(日臍堂)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으로 구성된 일제당은 조선 선조 33년(1600년 : 병자년)에 건축되어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수암 정사진(守庵 鄭四震), 윤암 손우남(倫庵 孫宇男), 등이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며

1629년에는 노계 박인로(蘆溪 朴仁老) 선생이 내유(來遊)하여 입암가(立岩歌) 29수와

입암별곡(立岩別曲)을 남기기도 하였다.

 

1907년 산남의진(山南義陣) 사건으로 일본군이 방화하여 소실되었던 것을 1914년 복원하였다.

일제당은 평면구성에 있어 보간 2칸 중 후열 3칸은 절벽에 의지하여 높은 자연석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앉혔는데,

어칸(御間)이 마루이고 양측에 온돌방을 각 1칸씩 배치하였으며,

 마루 뒷벽에 출입문을 세우고 누(樓) 마루를 꾸며서 계자 난간을 돌렸다.
 

                                                                                                          자료출처 : 포항시 관광 정보관

 

 

 

  

입암서원은 조선 효종 8년(1657년)에 현재 죽장면 입암리 토월봉(吐月峯) 아래에 창건된 것으로

임진왜란시 이 지방에 피난와서 살다가 죽은 문강공(文康公) 장현광(張顯光 : 1554~1637)을 봉안하고

지방유림인 동봉(東峯) 권극립(權克立 : 1558~1661), 우헌(愚軒) 정사상(鄭四像 : 1563~1623),

윤암(倫庵) 손우남(孫宇男 : 1564~1623), 수암(守庵) 정사진(鄭四震 : 1567~1616)을 배향하고 있다.


서원은 고종 5년(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으나 1913년에 복원했고,

묘우는 순종 원년(1907년)에 소실되었다가 1972년에 복원하였다.

입암서원은 목조와가(木造瓦家)의 ㄱ자형으로 그 일대가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서원주변에는 만활당(萬活堂), 일제당(日臍堂)이 있다.

 

 

 ▼ 노계시비

 

 

 노계시비 전면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다.

 

   입암

   무정히 서난 바회 유정하야 보이난다

   최령한 오인도 직립불기 어렵거늘

   만고애 곳게 선 저 얼구리 고칠 적이 업나다

 

 

 

입암28경

여헌 장현광은 임진왜란 이후 1596년 43세경부터 정유재란기에 입암에 머물렀습니다.

그뒤 이곳의 경치와 학문여건을 사랑하여 정자를 짓고 문하를 모아 학문을 강토하고 저술하였으며

다양한 출처를 거쳐 1637년 84세에 이곳에서 별세하였습니다.  

 

입암 28경은 여헌 장현광 자신의 시편 <立巖十三詠>에서 부터 노래되기 시작했으며,

입암서원을 중심으로 크고작은 것들이 다 빼어난 경치를 지니고 있고

그 이름도 이름 지은이의 학문적 태도와 풍류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 뒤 노계 박인로의 <입암>이하 29수의 연시조에서 입암 28경에 대한 경치와 절경을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입암 28경의 분포는 죽장면 소재지 남쪽 세이담으로 부터 입암리 일원과

동쪽 산지령에 이르기까지 입암서원을 중심으로 반경2km 이내에 걸쳐있습니다.

 

 

 

 

 

일광 까치소 주차장에서 영하 -1.0 도 날씨에 불구하고

연달리기를 하네요.

 

어렸을때 문종이와 싸리나무, 대나무 깍아서 많이도 갖고 놀았는데

세월의 변천으로 문방구에서 1,500원이면 쉽게

비닐 독수리연을 구입하는데~~~

 

언제 지원이와 함께 우리 고유 "연" 을 직접 만들어서

 날려보는 체험도 아빠와 좋은 추억이겠지요!

.

.

.

 

탁입암(託立岩)
   입암 또는 탁입암이라고 부르며 입암 28경이 입암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며 입암리의 지명도 여기에 근거하여 정해졌다고 합니다.

죽장면 소재지에서 상옥쪽으로 300여m 가다보면 도로변 좌측 마을이 솔안마을인데 마을앞에 20여m 높이의 입암이 우뚝서있고

우측에 일제당이 보이며 일제당과 입암 사이에 계구대가 있고, 일제당 뒷편에 기예암이 있습니다.

기예암(起豫岩)

   기예암은 일제당 뒷편 바위 언덕으로 바위틈사이에서 자란 나무들이 고풍스러움을 더해 주며 계구대와 연접해 있고

그 명칭은 논어에서 유래하였다고 하고 여헌 선생은 기여암이라 불렀다고하며

기예암 옆에 물멱정이란 우물이 있었다고 전하나

 만활당 옆에 오래된 우물이 물멱정이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피세대(避世台)

   구인봉의 동쪽면은 절벽으로 되어 있고 절벽 아래로 소를 이루며 물이 흐릅니다.

 이곳을 입암서원쪽에서 보면 절벽의 하단부에 평평하게 방처럼 패인곳이 있는데 이곳을 피세대라 하는데

여헌은 "後負危崖 前臨險流 又爲九 인 之所蔽擁 幽閑深寂 漠然與外人若不相接

(후부위애 전임험류 우위구인 지소패옹 유한심적 막연여외 인약불상접)"이라 하면서

초옥 수간을 지을 수 있겠는데 다만 높지 않아서 물이 불으면 잠기므로 짓지 못하겠다고 했다.

 " 이라 하면서 초옥 수간을 지을 수 있겠는데 다만 높지 않아서 물이 불으면 잠기므로 짓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초은동(招隱洞)

   招隱洞은 尋眞洞과 함께 입암이십팔경의 초입에 해당합니다.

죽장면 일광리(광천마을)를 지나 멀리 죽장장터가 보일 즈음에 왼쪽으로 속칭 까치소, 부엉드미 사이의골짜기,

즉 도덕골이란 곳이 招隱洞이며 그 다음 골짜기가 尋眞洞입니다.

여헌은 "洞在下口者 名以招隱 憐夫迷溺於宦海而莫之返者也 洞在溪上者 名以尋眞 思夫抱眞肥遯者而不得見也"라고 명명한 이유를 밝혔습니다.

 골짜기가 좁고 한적하며 깊이 들어가면 양편에 약간의 밭들이 있고 민가도 있었던 곳입니다.

경심대(鏡心台)

   탁입암의 정면에 펼쳐진 암반을 경심대라고 하며 냇물이 많을 때는 대부분 물에 잠기며,

가운데 수어연을 감싸고 있습니다.

계구대(戒懼台)

   입암과 기예암 사이에 있는 절벽이

계구대이며 계구는 중용의 戒愼乎其所不睹(계신호기소불도) 恐懼乎其所不聞(공구호기소불문)에서 나온말로

도를 떠나지 않도록 敬畏하여 마음에 천리본연의 상태를 유지해야 함을 함축한 말입니다.

수어연(數漁淵

   탁입암의 정면에 펼처진 암반이 경심대인데 경심대 가운데에 바위가 패어서 늘 물이 고이는는 곳으로

수심이 항상 1m이상을 유지할 정도로 깊고 맑으며 물고기가 노는 것을 구경하며 셀수 있다하여 수어연이라 명명했다고  합니다.

토월봉(吐月峯)

   입암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산봉우리를 가리킨 것으로 솔안마을 뒷산줄기가 서원 뒤쪽으로 흘러

서원의 동편에 이룬 둥근 봉우리인데 교훈적 가탁없이 서정적으로 사물을 파악하여 붙인 이름이라 합니다.

상두석(象斗石)

   일제당 앞뜰의 하천가에 작은 바위들이 북두칠성과 같이 놓였다하여

그 일곱 개의 바위를 상두석이라 합니다.

답태교(踏苔橋)

   계구대나 일제당에서 탁입암의 앞쪽으로 돌아 나오려면 몇 개의 작은 바위를

돌다리 처럼 밟아야 된다고 하여 답태교라 합니다.

세이담(洗耳潭)

   초은동 입구의 자호천에 속칭 "까치소"란 소가 있는데

 물이 맑고 깊어 이를 세이담이라고 명명하지 않았겠나 생각합니다.

화리대(畵裡台)

   입암 장터에서 69번 지방도를 따라 입암까지의 하천주변이 야연림 자리입니다 .

이 야연림 자리를 따라 서원을 향해 오다가 솔안마을 들어가는 響玉橋 못가서 북쪽 산에 붙여 선 바위가 畵裏臺입니다.

그 모양이 특이한 것은 아니어서 기문에서도 "雖不能自奇 而諸嶺諸峯諸巖諸石凡

一眼所收得者 惚難狀 依依畵中 似非眞面"이라고 하였습니다.

경운야(耕雲野)

   지금의 죽장면사무소 뒤로 자리잡은 마을이 입암 큰마을 평지동입니다.

 이 마을에는 주로 東峯 權克立의 후손인 안동권씨들이 世居하고 있는데, 현재의 마을자리와 거기서 탁입암쪽 들이 耕雲野입니다.

입암에서 바라보면 隔塵嶺이 이 들 뒤로 내려오면서 바깥 세상을 가로막고 있고,

입암 아래로 흘러 가던 佳士川은 이 들 앞으로 사라집니다.

여헌은 기문에서 각별한 관심으로 이 명명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정운령(停雲嶺)
   戒懼臺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마주치는 것이 九 인峯이며,

구인봉에서 남쪽으로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수석봉:해발820.5m)가 停雲嶺으로 초은동의 뒷산 정상입니다.

함휘령(含輝嶺)

   정운령의 동쪽으로 더 멀리 보이는 높은 봉우리가 含輝嶺이며,

기문은 "每見白雲停聚於其頂 或如冠巾之戴首 或如橫帶之在腰 有或崖壑掩藏盡者 有或峯巒露出半者"하다고 하여

꼭 어느 지점이라기보다 그 일대를 가리킨 것으로 보이며, 봉화봉(해발610m)주변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산지령(産芝嶺)

   <立巖記>는 産芝嶺의 위치에 대해 다만 "吐月峯之東 有嶺深秀 半藏半露 蒼然蔚然 樵夫採客 鮮或跡焉者"라고만 하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골짜기나 봉우리의 위치를 지적하지는 않았습니다.

현지의 고로들은 욕학담의 뒷산 골짜기와 봉우리를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토월봉의 동쪽이라 했지만 함휘령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산지령의 산이 서쪽으로 가서 함휘령을 이루었다고 했고,

산지령 설명에서 반은 감추이고 반은 드러났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도 역시 욕학담 뒷산이 옳을 것으로 보입니다.

 명명을 설명하면서 商山四皓의 紫芝歌 고사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있는 것도 구체적 경물보다

관념적으로 그 일대를 가리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채약동(採藥洞)

   서원에서 마주 보이는 가까운 봉우리가 九 인峯이고 구인봉 뒤로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含輝嶺인데 지도상으로 해발 610미터의 烽火峯입니다.

 이 함휘령에서 입암 방향으로 흘러 내리는 골짜기를 採藥洞이라 했습니다.

한시를 전문 번역인용한 시조에서 보듯이 구체적으로 승경을 지적한 것은 아니며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골짜기를 함휘령의 의미와 조화하여 명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월탄(釣月灘)

   31번 국도상에 입암1교와 입암2교를 가설하면서 합류대를 깨고 조월탄을 매워 지금은 흔적도 없으나

입압1. 2교 사이의 산자락이 하천과 접하는 부분에 합류대가 있었으며

그 아랫쪽 죽장초등학교 뒷편쯤에 조월탄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구인봉(九 峯)

   계구대에서 정남 방향으로 내 건너편에 선 봉우리가 구인봉입니다.

송내교를 건너기 직전 오른쪽으로 붙은산인데 동쪽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立巖記>에서 "峯在溪之南 立巖在溪之北 若相拱揖者然" 이라 하여 입암과 서로 읍하는 형상이라했습니다.

욕학담(浴鶴潭)

   입암서원에서 상옥 쪽으로600여m올라 가다보면 물이 맑고 암벽이 절경을 이루는곳이 있는데

 여기를 욕학담이라 하는데 학소, 학담, 학소대등으로 부르고 있으며, 옛날에 욕학담 옆에 낙문사란 절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소로잠(小魯岑)

   입암이 있는 솔안마을의 서쪽 "달바위산" 산등성이는 마을 뒤로 경사를 이루면서 높이 솟아 있습니다.

 이것을 여헌은 공자의 登東山而 小魯 登泰山而小天下 고사에 의하여 소로잠이라 불렀습니다.

물멱정(勿冪井)

   <立巖記>에는 기여암 옆에 우물이 있어서 勿冪井이라 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기여암에서 좀 떨어진 萬活堂 동북쪽에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물막정이라 부르니,

혹 여헌이 명명한 물멱정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심진동(尋眞洞)

   심진동과 초은동은 죽장면 소재지에 이르기 전 자호천에 절경을 이루고 있는 속칭 까치소에서

일광리의 개일이 심진동이고 도덕골이 초은동이라 칭한 것으로 보입니다.

야연림(惹烟林)

   입암장터 입암1교에서 서원쪽을 향하여 佳士川을 따라 걸으면 그 길이 惹煙林터이다.

명명 당시에는 이 냇가를 따라 전아한 숲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숲을 전혀 볼 수 없고 69번 지방도로가 숲이 있던 자리에 닦여 있습니다.

상암대(尙巖台)

   욕학담의 100여m하류에 "자래소"란 곳이 있는데 이곳 계곡을 가로지르는 암반을 상암대라 합니다.

 

향옥교(響玉橋)

   입암의 50m 하류에 지방도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세월교가 있는 부분이 향옥교 자리로

바위 사이로 맑은물이 흐르고 아직도 큰 바위들이 아름답습니다.

합류대(合流臺)

   탁입암 쪽에서 흐르는 가사천과 월평리 쪽에서 흐르는 자호천이 합류하여 영천댐으로 흘러들게 되어 있는데

합류하는 지점에 큰 바위가 있어 이를 합류대라 하였으나 31번 국도상에 입압1교와 입암2교가 가설되면서 없어졌습니다.

격진령(隔塵嶺)

   함휘령의 서쪽으로 마을을 향해 낮아지는 봉우리가 隔塵嶺인데 지금의 죽장초등학교 앞산 능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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