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죽장

문화제

반딧불이(죽장) 2008. 6. 17. 22:16

계시비 ( 향토유적 )

지정일 : 2001-11-00
소재지 :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산21번지
 

입암서원 도로건너편 아래에는 2001년 11월에 세운 노계 박인로의 시비가 있다. 가로 3m, 세로 1.2m, 높이 2.5m의 규모로 세워졌는데 까만 오석에는 노계의 시와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2001년 노계시비 건립위원회에 의해 세워졌다.
시비의 글은 문인협회 포항시지부장 김일광씨가 지었으며 글씨는 학정 이돈흥, 조각은 김두환씨가 맡아 제작하였다.

입암 29곡은 노계 박인로(1561∼1642년)의 작품으로 입암의 절경을 노래한 시조로 1629년경 여헌 장현광(1554∼1637)선생과 같이 노닐면서 지은 것으로 보여진다.

지금 전해오는 29수 가운데 <입암>과 관련된 것이 10수이며 이 연시조에 등장하는 경치는 28경 가운데 19종, 28경 이외에 <정사>가 한 수이다.
박인로 선생은 이 고장에 머물던 여헌 선생과의 교분이 각별하여, 69세의 선생을 찾아 죽장에 왔다가 임암의 풍광에 취하여 지은 것이 입암29곡인데 노계문학 중에서도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노계시비 전면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있다.

입암
무정히 서난 바회 유정하야 보이난다
최령한 오인도 직립부기 어렵거늘
만고에 곳게 선 저 얼굴리 고칠 적이 업나다

박인로 선생은 무관 및 시인으로 1561년 영천 북안 도천에서 태어나 1642년까지 여든 두 해를 살았으며, 자는 덕옹, 호는 노계 또는 무하옹이라 하였으며, 본관은 밀양이다.

선생은 32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이 되어 전쟁터로 달려갔으며, 39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 선전관, 조라포 만호의 명을 받아 무인으로서 활약하였으며 전쟁으로 도탄에 빠진 민생들을 정성껏 보살피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선생은 의병활동과 관직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남아의 대사업이 글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문학임을 깨닫고 대사업이 글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문학임을 깨닫고 유학자로 전력하는 한편 성인들과 교류하면서 성리학에 심취하였다.

노계의 문학은 일상어를 통한 사실적인 묘사와 더불어 질박하면서도 유창하고 아름다운 문체, 구성의 웅장함으로 일찍이 정철, 윤선도와 함께 조선 가사문학의 한지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8차례나 죽장을 방문하여 입암을 배경으로 가사<입암별곡>과 시조<입암29곡>을 지었으며, 문집 [노계집]에는 조흥시가 외 64수의 시조, 선상탄, 누항사 외 7편의 가사를 남겼다.

 

 

만활당 ( 입암서원中 )
지정일 : 2002-09-25
소재지 :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만활당은 정면 3칸, 측면 단칸의 박공기와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사천 계곡물이 굽이쳐 흐르는 언덕위에서 볼 때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곳은 조선중기 성리학자인 여헌 장현광 선생이 임진왜란 때 피난 와서 숨어 생활하던 곳이다.

이 건물은 막돌로 쌓은 3단 축대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처마 끝의 서까래가 한 단(段)인 둥근 모양으로 파서 만든 굴도리집으로 정면 3칸 중 어칸은 전명에 올거미 띠장널문을 두 짝 달아서 마루방을 꾸미고 양쪽의 좁은 문은 각각 온돌방으로 연결된다. 마루바닥은 짧은 널을 가로로 하고 긴 널을 세로로 놓아 짠마루 형태인 우물마루를 깔고, 마루방 뒷벽에는 이불 및 옷을 반침으로 꾸며 놓았다.

 

 

유인 영양이씨 열부비 ( 향토유적 )
소재지 : 포항시 북구 죽장면 일광리 107-1번지
 

이 열부비는 남편을 지성으로 섬긴 열부 영양이씨의 열행을 기록한 비석이다.

이씨는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양반 가문의 규범과 태도를 익혀 부녀자로서 지녀야 할 어질고 너그러운 덕행을 겸비하였으나 어려운 가문으로 시집을 와 생계를 유지해 오던 중 남편이 우연히 두 눈이 어두워짐에 따라 슬하에 3남1녀를 둔 이씨의 가정형편은 더욱 역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씨는 혼자 가정을 꾸려가면서 한편으로는 남편의 병구환에 온갖 정성을 다하던 중 백일정성 기도 끝에 제화(난초 및 콩과식물)가 눈병에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동설한에 제화를 구하러 온 산천을 헤매던 차 하늘도 감동했던지 어느 고목나무의 썩은 구멍에서 제화 두송이를 발견하여 정성을 다해 남편의 눈에 붙여 주었다.
그날 밤 남편이 냉수를 찾길래 우물에 가서 물을 뜨니 자라가 이씨의 손가락을 물고 나옴으로 이것도 약이 될까 생각하여 달여서 남편에게 먹게 하였더니 10여 년간 맹인으로 고생하던 남편의 눈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 소문이 온 지방에 알려져 서울의 유림향약으로부터 열부표창을 받았다. 그의 5대손 김문원이 여러 종친과 문중의 협력을 얻어 비석과 비각을 죽장면 지동리에 세워 열부 영양 이씨의 열행을 온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성계 심공 불망비 ( 향토유적 )

지정일 : 1839-11-28
소재지 : 포항시 북구 죽장면 봉계리 472번지
위치 : 포항시 북구 죽장면 봉계리 472번지
비석 : 화강석(높이 1.2m, 폭 0.4m) 1개
비각 : 목조와가(대지 33㎡, 건평 6㎡) 1동
건립년도 : 1839년 11월 28일
봉계리 성계심공불망비는 심희문 선생의 공을 기리는 비석이다. 공의 본은 청송(靑松)이며 자는 효중, 호는 성계, 고려전리판서 심원부공의 13대손이다. 공은 1772년 출생하여 1823년에 별세하였다.

 

공의 문학 등 업적에 대하여는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어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한때 큰 흉년을 당하여 주민이 아사지경에 이르렀을 때 전곡을 인근 주민에게 희사하여 기민을 구제하였다 한다. 그 후 주민들이 이 공적을 지방 유지들과 논의하여 1839년 11월 28일 봉계리 마을입구에 그의 공덕을 칭송하는 불망비를 세웠다.

1976년 이르러 사림에서 묘전에 묘비를 세웠으며, 불망비가 풍우에 훼손되어 문자가 보기 어려워서 1977년 8월에 다시 세웠다.

 

 

입암서원일원(立岩書院一圓) ( 경상북도 기념물 제70호 )
지정일 : 1986-12-11
소재지 :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산21번지 외
 

입암서원은 조선 효종 8년(1675)에 현재 죽장면 입암리 토월봉 아래에 창건된 것으로 임진왜란시 이 지방에 피난와서 살다가 죽은 문강공 장현광(1554∼1637)을 봉안하고 지방유림인 동봉 권극립, 우헌 정사상, 윤암 손우남, 수암 정사진을 배향하고 있다.

 

 

고종 5년(1868)에 훼철되고 순종원년에 묘우가 소실되었다가 1913년에 복원되고 1972년에 묘우를 복원하였다. 입암서원은 목조와가의 ㄱ자형으로 그 일대가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만활당, 일제당이 있다.

 

일제당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으로 구성된 일제당은 조선 선조 33년(1600년:병자)에 건축되어 여헌 장현광, 수암 정사진, 윤암 손우남등이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며 1629년에는 노삼계, 박인노 선생이 내유하여 입암가 29수와 입암별곡을 남기기도 하였다. 1907년 산남의진 사건으로 왜군이 방화 소실되었던 것을 1914년 복원하였다. 일제당은 평면구성에 있어 보간 2칸중 후열 3칸은 절벽에 의지하여 높은 자연석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앉혔는데, 어칸이 마루이고 양측에 온돌방을 각 1칸씩 배치하였으며, 마루 뒷벽에 출입문을 세우고 루마루를 꾸며서 계자 난간을 돌렸다.

 

 

만활당(萬活堂)

 

정면 3칸, 측면 단칸의 박공기와 지붕 구조인 만활당은 계류가 굽이쳐 흐르는 언덕위에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조선중기 성리학자인 旅軒 張顯光(여헌 장현광)이 임진왜란때 피난와서 기거하던 은숙사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막돌을 3단 쌓은 축대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웠다. 삼량가로 홑처마의 굴도리집이다.

정면 3칸중 어칸은 전면에 올거미띠장널문을 두짝 달아서 마루방을 꾸미고 양 협문은 각각 온돌방이며, 마루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마루방 뒷 벽에는 입암서원 대청의 어칸 널문을 달아서 반침을 꾸며 놓았다.

 

 

 

 

채악당 ( 향토유적 )
소재지 : 포항시 북구 죽장면 매현1리 833번지
위치 : 포항시 북구 죽장면 매현 1리 833번지
건물
  목조와가 우산각(정면1간, 축면2간) 1동 대지 397㎡, 건평 66㎡
건축년대
  조선 인조21년(1643년)에 건립되었다가 소실되어 숙종26년에 재건함
소유자 : 매현 경주 손씨 문중

 

노잠(魯岑) 손여두(孫汝斗)는 숙종 계미년(1703년) 8월 28일 손현(孫鉉)의 장자로 태어났다. 병오년(1726년) 10월 부 손현이 내환으로 생명이 위독하자 무명지에 피를 내어 부친을 살렸으며 부친 별세 후 묘소 옆에 연락을 세워 3년간 시묘살이하여 세인들로부터 효자로 칭송을 받았다.

병진년(1736년) 4월 두형제(손여두, 손여규)의 우애를 기리기 위한 병당으로 71세 나이로 사망한 뒤 행상걸인의 방화로 인해 소실되었는데 손여두의 7대손인 손수기가 숙종 경신년(1700년)에 재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72년 일부를 보수하였다.

 

 

서운사 ( 향토유적 )
소재지 : 포항시 북구 죽장면 일광리 628번지
건물현황
 
극락전1동(목조와가 20평), 산령각 1동(목조와가 5평), 석불(아미타불관세음보살)
3, 탱화(20.5*1507m) 3, 문정대사 부도, 설송대사 부도 각1개
소재지 : 포항시 북구 죽장면 일광리 628번지
종단 및 교구명 : 조계종 11교구 불국사

서운사는 신라 선덕여왕 18년 10월 2일(서기 662년) 창건되었다 하나 창건지는 미상이다. 그 후 서기 713경 정원혜, 강영우, 이명순 등의 주지가 창건을 추진하여 이봉상 스님 재직시 재창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찰로 문화재로써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특히 이 지역은 속칭 개일이라는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어 조용하고 주변 경관이 빼어나 예부터 개양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재당 ( 입암서원中 )
지정일 : 포항시 북구 죽장면 일광리 628번지
소재지 :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1600년 건축된 일제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으로 자연석 축대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어칸은 마루로 이루어져 있고 양측에는 온돌방이 각 1칸씩 배치되어 있다.

뒤쪽에 출입문을 세우고 다락을 꾸몄으며, 툇마루에는 목조난간을 세워 서원의 운치를 한껏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1907년 산남의진 시 왜군이 방화하여 소실한 것을 1914년 복원하였으며 건물배치에 있어 자연경관은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다.

 

 

월성손씨 효행비 ( 향토유적 )
지정일 : 2002-08-27
소재지 : 포항시 북구 죽장면 두마리 489
비석 : 화강석(높이 1.45m, 폭 0.6m) 1개
비각 : 목조와가(대지 36㎡, 건평 9㎡) 1동
건립년도 : 1955년 5월
 

월성 손씨는 서기 1825년 죽장면 매현리에서 손진석의 여식으로 태어나 죽장면 두마리에 거주하는 정재원에게 출가하였다. 그러나 가산은 넉넉지 못한데다 연로한 시부모를 모시게 되어 낮에는 부부가 함께 들일을 하고 밤에는 길쌈을 해서 주야로 정성껏 봉양하였다 한다.

그러던 중 홀로 된 시어른이 심한 중병에 걸리자 백방으로 약을 구해 썼으나 차도가 없자 명산 대천에 치성을 드리기로 하고 밤마다 부부가 함께 보현산에 올라가 기도를 드리는 언제나 호랑이가 따라 다녔다고 전한다.

부부의 정성에 하늘도 감동하였는지 시어른의 병이 쾌유되고 70수를 누리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또 3년 동안 시묘를 하여 시어른에게 정성을 다하자 며느리의 효행이 널리 알려지게 되어 경상북도 관찰사와 경주 부윤으로부터 효부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았다. 뜻있는 향토의 인사들과 후손들이 효의 정신을 길이 본받고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1955년 5월에 두마마을 입구에 비각을 건립하게 되었다.

 

 

 

산남의진기념비 ( 향토유적 )
소재지 :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산남이라 함은 조령(문경새재)이남의 영남지방을 일컫는 말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로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전국각지에서 기개 있는 선비와 우국지사들은 분함과 억울함을 참지 못하여 다투어 의병을 조직하고 더러는 자결하기도 하였다.

당시 산남도찰사 정환직은 평소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던 몸으로 왕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밀지를 받은 데서 애국충성이 시작되었다.

“경이 화천지수(華泉之水)를 아는가?” 이제 제나라 환공을 적의 추격에서 탈출시킨 봉추부의 고사로써, 정환직으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는데 힘써달라는 황제의 간곡한 당부가 담겨져 있었고 이에 정환직을 을사조약 직후 12월 5일 바로 관직을 사퇴하고 아들 정용기와 함께 계획을 수립하여 먼저 영남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그 결과 산남의 진이 조직되었다.

정환직, 정용기, 최세윤으로 이어진 산남의진은 신돌석 부대와 함께 구한말 제2단계 의병운동을 대표하는 의진으로 포항, 영천일대를 중심으로 일제에 대항하여 거센 항쟁의 횃불을 들고 나라를 구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입암서원의향나무(立岩書院의향나무) ( 기념물 제71호 )
지정일 : 1986-12-11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178
 

조선중기 문신이며 성리학자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선생이 임진왜란때 난을 피하여 이곳에 왔을 때 심은 향나무로 입암서원(立岩書院) 뜰안에 있으며 안동권씨(安東權氏)문중 소유로 되어있다.

측백나무과의 상록침엽교목인 향나무는 수형(樹形)이 곧고 수령에 비하여 수세(樹勢)가 강하다. 이 향나무의 높이는 25m, 둘레 3.5m로 1500년대에 심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입암서원(立岩書院) ( 기념물 70호 )
지정일 : 1986-12-11
소재지 :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산21번지 외
 

죽장면 입암리에 있는 서원으로 효종 8년(1657년) 장현광, 권극립, 정사상, 손우남, 정사진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고종5년(1868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이 철폐되었으나, 1913년에는 강당이, 1974년에는 이들의 혼백을 모시는 묘우가 복원되어 현재 경내에는 3칸의 묘우와 3칸의 강당 및 부속건물인 일제당 · 만활당 등이 배치되어 있다.
매년 2월 하정(下丁:세번째 丁日)에는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향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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